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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란 바랄수록 가까워지죠."

더비를 '비인기 중의 비인기 활동'에서 단숨에 국민 스포츠이자 엔터테인먼트로 끌어올린

"역전의 명수" 스탠다드 스테이트를 만나보았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호르트 교육재단의 대표, 스탠다드 스테이트입니다. 현재 호르트 아카데미를 총괄 관리하고 있습니다.

 

호르트 아카데미는 현재 모두가 손꼽는 명문교로 급성장했잖아요.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를 포함해서 모두가 노력한 결과지요. 운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고요. 좋은 투자자들이 동참해주었고, 모금도 대성공이었고, 학생들의 수준도 높았고. 모든 것들이 다 기적처럼 맞아떨어졌어요. 불미스러운 일 하나 터지지도 않았고. 사실 지금도 꿈 같아요. 더비란 'TV로만 볼 수 있던 먼 나라의 경기'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더비의 불모지와도 같았던 곳에서 선수가 되었던 이유가 있나요?

 제 유년 시절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네요. 저는 연구단지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실험소에서 일하는 연구원이었고, 어머니는 우마무스메의 신체능력을 활용한 인부였죠. 주변에는 온통 학교, 도서관, 실험실, 공장 플랜트.... 레이스랑은  거리가 멀디먼 환경이었죠. 우마무스메들은 달리기 위해서 태어났다고들 이야기하는데, 달릴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와 저만이 그 단지의 유일한 우마무스메였기 때문에 달리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고요. 그런데도 가끔 무작정 질주하고 싶은 욕망이 끓어 올랐어요. 어찌할 도리도 모르면서.

 그러던 어느 날, 연구실 한구석에 있는 작은 구형 TV를 만져보다 외국의 채널이 잡혔어요. 저와 어머니와 비슷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열을 맞춰 대기하다가 탕! 소리에 달려 나가더군요. 각자 다른 전략으로, 다른 주행법으로 최대한 빠르게...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죠. 그게 제 생애 최초의 더비였어요. 그날 이후 몰래몰래 해외 더비 경기를 봤어요. 누가 금지한 건 아니었지만 왠지 들켜선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러다가 한 달 정도 됐을 때 부모님께 걸렸죠. 혼나려나 했는데 꼭 안아주셨어요.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한 거예요.

 제 마음을 더는 숨길 수 없게 된 후부터는 과감해졌어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작은 대회마다 나가보고, 사전을 옆에 끼고서 해외 서적을 뒤지고... 첫 출전인데도 경기마다 1착! 같은 일이 일어나진 않았어요. 그렇지만 점차 두각을 보이는 데에는 성공했죠.

  어느정도 요령이 생기고 나서는 무작정 큰 무대로 뛰어들었어요. 그 중에서는 아시아 대회도 있었어요. 저는 국가대표로 나갔고요.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단, (요즘 말로는 '근자감'이라고 하던가요? 후후.) 무모한 용기가 솟았죠. 사실상 도박이었는데... 성공했어요. 그 후로는 무서울 게 없더라고요. 그렇게 한 명의 프로 우마무스메가 탄생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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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영광을 제가 어떤 길을 가든 응원해준 부모님과 연구단지 사람들에게 바치고 싶네요.

그래서 그 승부복도 실험가운에, 보안경에, 공업용 장갑인 거군요?

 네, 맞아요. 전통복 위에 입는 거라 무척 언밸런스하지만, 이게 제가 자라온 환경이니까요. 저를 보고 자라서인지 컨디션스까지 실험가운을 위에 걸쳐 승부복으로 입더군요. 그만큼 제가 멋있었단 거겠죠?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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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탠다드 스테이트의 기타 정보

생일   9월 17일 

​키   165cm    

체중   살짝 감소

(선수 시절)주법   추입       

취미   보드게임 

호르트 아카데미를 설립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맨바닥에서 시작하느라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그래서 후세대의 우마무스메들은 좀 더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궁금한 게 있을 때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도움이 필요할 때 든든한 조력자가 곁에 있었으면 했죠.

 "내가 이만큼 힘들었으니 너희도 고생을 해봐야 해!" 같은 건 그냥 꼰대 사고잖아요? (폭소) 저도 나이가 나이다 보니 꼰대가 아주 아니라고는 말을 못 하지만, 적어도 젊은이들에게 불필요한 고생을 안겨주고 싶진 않아요. 아니지, 고생이 뭐야, 그건 그냥 고행이지.

 그래서 선수 생활로 번 돈도, 제 노하우도 쏟아부어 가며 학교를 지었어요. 너흰 나처럼 힘들게 살지 마! 하는 마음 하나로요.

 누군가가 만든 길은 다른 누군가가 계속 걸어줘야 길인 법이죠.

수양 자식 스탠다드 컨디션스와 사이가 좋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제가 은근히 장난기가 많아요. 이 나이 먹고도 장난이 즐겁더라고요. 후후 아직도 컨디션스를 놀려먹는 게 삶의 낙이랍니다.

 컨디션스를 처음 만났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보육원 교통사고 생존자에서 유일한 우마무스메였던 그 아이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그 눈을 본 순간 바로 보호자가 되어줘야겠다 싶었죠. 별다른 꿍꿍이 같은 건 없었어요.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결혼도 안 했는데 아이가 생겼다고 세간에선 난리였지만.

  컨디션스를 가족으로 들인 건 제 삶에서 제일 잘한 일이랍니다.

 

현재 가장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호르트 아카데미가 빠른 시간 내에 눈부시게 성장한 만큼, 앞으로도 아시아 굴지의 더비 학교로 뿌리를 내렸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어머니의 입장으로서 말하자면 컨디션스가 '스탠다드 스테이트의 자식'보다는 '스탠다드 컨디션스'로 이름을 남기길 바라요. 저는 이미 역사에 한 획을 찐-하게 그었으니 말이죠. 후후.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마디를 해주자면?

꿈을 계속 꾸세요. 아무리 터무니없는 것이라도 계속 가슴에 품으세요. 그러면 어느새 가까워져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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