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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님

《 엘프가 10만분의 1의 확률로 감자를 삶게 된 사연 》

* 본 작품은 타브 대신 ‘찬’이라는 OC적 요소가 있습니다.

* 현대AU로 뱀파이어 설정이 원작(‘발더스 게이트 3’)과는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 막 지기 시작할 무렵, 어느 도시 외곽의 조용한 술집. 일을 마친 농부들이 화기애애하게 떠들며 술집에 들어간다. 곧이어 도시에서부터 달려온 은빛의 고급스러운 세단 한 대가 골목에 들어서더니 술집 건물 옆에 주차를 한다. 깔끔한 하얀 셔츠와 검은 슬랙스 차림으로 운전석에서 내린 엘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무판자에 붓글씨로 ‘고룡 술집’이 적힌 간판을 확인한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농장 바로 옆에 술집이 있는 건 또 처음 보네.”

 엘프는 혼자 중얼거리며 가게의 문을 열었다. 짤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손님들이 대화하는 소리, 통기타 소리에 맞춰 노래하는 잔잔하고 낮은 목소리가 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는 가게 안을 둘러본 뒤, 구두가 바닥을 밟는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걸어갔다. 고된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술집을 찾은 농부들 사이로 눈에 띄게 깔끔하고 화려한 모습의 엘프가 지나갔다. 그는 아무도 없는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날카로운 분위기의 엘프는 둥근 은테 안경을 가볍게 만지작거리며 술집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거나, 두건을 두르거나, 밀짚모자를 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사람은 꽤 어려 보였다. 엘프는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오길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을 꺼내어 인터넷에 ‘고룡 술집’을 검색했다. 후기나 리뷰 같이 도움이 될만한 정보가 하나도 나오지 않자 그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Hanging moon in fog,

Mists will lead where you belong-”

 부드럽고 감정이 깃든 목소리가 엘프의 뾰족한 귀를 스쳐 지나갔고, 그는 고개를 들어 가게 앞쪽에 놓인 작은 무대를 바라보았다. 건장한 체격에 짧은 갈색 머리의 청년이 두 눈을 감고 서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엘프는 무언가 생각이 나는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턱을 괴었다. 그때, 가게 주인이 메뉴판을 들고 다가오자 엘프는 찡그린 표정을 풀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어떤 걸로 주문하시겠어요?”

 주인이 메뉴판을 엘프에게 건네며 말을 이어갔다.
 
“그나저나, 이곳에 젊은 분이 손님으로 오는 경우가 드문데, 드디어 입소문이 나나 봅니다.”
 
주인은 자랑스러운 듯 호탕하게 웃었다. 엘프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젊게 봐주신 건 감사하지만, 저도 꽤 나이가 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사실, 들어오실 때 새하얀 머리만 보고 단골 손님의 친구분이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옷차림이나 차를 보고 도시에서 오신 젊은 분이신가? 싶었죠.”

 술집 주인이 말을 끝내자 엘프는 "내 차는 또 언제 봤대?" 하며 중얼거렸다. 

 “….”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다행히 계속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가 그 빈 자리를 채워주었다.

 “Cause you and I are everywhere,

 The night is young-”

 공기를 타고 흐르는 음악은 잔잔했다. 그러나 약간의 경계심과 불만이 섞인 듯한 엘프의 목소리는 조금 날카로웠다.

 

 “사장님, 제 친구들은 다 이런 스타일이라서요. 그리고 저기, 저분은 붉은 머리에 아주 멋진 모습으로 오셨는데요? 또, 제 나이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 거니까…”

 억지 미소를 지으며 주인을 향해 쏘아붙인 엘프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주문이나 할게요.”

 “아, 네…. 여기 메뉴판입니다.”

 ‘귀찮은 일은 질색이야!’ 라고 할 것만 같은 흰 곱슬 머리 엘프는 메뉴판을 대충 훑어보고, ‘추천’ 태그가 붙은 ‘무알코올 고룡 드링크’를 골랐다.

 “네, 손님.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하하.”

 엘프는 주인의 뒷모습을 째려본 뒤, 다시 무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다리를 꼬고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괸 자세로 앉아 무대에 집중했다.

 노래하는 청년은 하프 엘프인 것 같았다. 그의 귀는 엘프보다 덜 뾰족하고, 눈썹과 귀에는 작은 장신구가 달려 있었으며, 눈 주위에는 회색 문신이 있었다. 문신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오른쪽 눈은 전체적으로 검붉은 색임을 알 수 있었다. 짧은 머리의 그는 큰 동작 없이 서서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Down, down, down by the river,

Down, down, down by the river-”

 매끄럽게 고음을 소화해내는 목소리에 엘프는 ‘오’ 하며 감탄을 했다가, 금방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

 무대를 지켜보던 그의 표정은 어느새 심각해졌고, 핸드폰을 꺼내어 유튜브에 접속했다.

 “설마…”

 그는 최근에 시청한 ‘Down By The River 커버 – 포트리스’라는 제목의 영상을 틀었다. 그가 화면을 위로 조금 올리면 100만이 넘는 숫자가 보였고, 좋아요 버튼과 구독 버튼은 이미 눌러져 있었다.

 “뭐, 우연이겠지?”

 엘프는 눈썹을 올렸다 내리며 침착한 표정을 지었지만, 화면과 무대를 번갈아 보며 손톱 끝을 테이블에 두드리고 있었다. 그때, 주인이 음료를 들고 다가왔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주인이 테이블에 음료를 두고 떠나려는 순간, 엘프가 말을 걸었다.

 “아, 사장님? 잠깐만요. 여쭤볼 게 있습니다.”

 엘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주인이 돌아보자 질문했다.

 “혹시, 저기서 노래하시는 분은 누구시죠? 사장님 말대로라면 저분도 나이가 좀 있으신 건가요? 딱히 그런 느낌은 아닌데?”

 엘프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졌지만, 테이블 아래로 내려간 두 손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

 “아하, 찬이요? 젊고 대단한 친구죠. 5년 전에 이 동네로 이사 와서는 그때부터 여기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찬? 아, 혹시 왜 그렇게 대단한 거죠?”

 엘프는 청년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친구, 되게 오래 전 노래들을 주로 부르거든요. 그래서 여기 오시는 분들마다 찬이를 정말 좋아하셔요. 아까 부른 곡도 되게 옛날 노래로 아는데…. 아, 손님은 모르시려나? 그리고 무엇보다 노래를 정말 잘하죠? 크으, 데려오길 잘했다니까.”

 주인은 뿌듯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무대를 바라보았다. 반면에 엘프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또 다른 의미로 대단한 건 없나요? 유튜브에서 유명하다든가… 그런 건?”

 “네? 유, 유트? …뭐라고요?”

 주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진지한 표정의 엘프를 내려다보았다.

 “아, 모르시면 됐습니다. 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주인이 테이블을 떠나자, 엘프는 어느새 새로운 곡을 연주 중인 ‘찬’이라는 청년을 쳐다보았다.

 “근데… 진짜, 비슷하다.”

 엘프는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유튜브에서 ‘포트리스’의 영상을 재생했다.

 [손만 봐도 잘생겼는데, 노래까지 잘해. 얼굴도 진짜 잘생겼을 듯]

 [근데 기타 너무 작은 거 아니야? 하와이 가도 될 듯]

 [얼굴 공개는 절대로 안 하시단다. 그만 좀 캐물어]

 엘프는 화면을 내리며 자신이 써 놓은 댓글들을 살펴보았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코웃음을 쳤고, 새로운 댓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님들 나 오늘 포트리스 진짜 닮은 사람 봄. 목소리랑 기타 든 모습이 너무 비슷했음]

 액정 속에는 듬직한 상체가 화면을 가득 채웠고, 몸에 비해 작아 보이는 통기타를 연주하는 두툼한 손이 보였다. 엘프는 ‘포트리스’의 영상과 무대에서 노래하는 ‘찬’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려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자 그는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 어디서 봤어요?]
[↳ 종족도 모르면서 그런 말 왜 함? 언제는 알아내려고 하지 말라며ㅋㅋ]

 어느새 엘프가 쓴 댓글에 답글이 두 개 달렸다. 그는 두 번째 답글을 읽으며 미간을 팍 찌푸렸고 안경을 벗었다. 결국, 그는 손가락에 불이 날 듯이 자판을 두드렸다.

 [↳ ? 아니 그냥 비슷했다고. 누가 보면 내가 정체를 다 밝힌 줄 알겠네;;]

 갑자기 씩씩거리기 시작한 엘프는 음료를 두 모금 마시고, 새로운 답글이 달릴 때까지 뚫어지게 핸드폰을 쳐다봤다.

 [↳ 스때리TV 님. 포트리스 님 옷에는 항상 개털 묻어 있음.]

 스때리, 아니, 하얀 머리의 엘프는 ‘오’ 하며 작게 감탄을 했다. 그는 공연이 다 끝나고 나서야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무대를 내려온 찬이 홀로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발견한 엘프는 자리에서 일어날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찬이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어, 안녕하세요. 찬 씨 맞죠?”

 고개를 숙여 테이블만 쳐다보던 찬은 낯선 목소리에 깜짝 놀라 움찔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의 색이 다른 두 눈, 검은 바탕에 붉은 눈동자와 흰 바탕에 푸른 눈동자가 엘프를 올려다보았다.

 “제,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노래를 부르던 목소리와는 달리 잔뜩 긴장한 톤이었다.

 “아,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까 여기 사장님이 알려주셨어요. 불편하시면, 제가 돌아가도록 하죠.”

 엘프는 공손한 말투로 말하며 떠나기 전에 찬의 회색 셔츠를 곁눈으로 슬쩍 흘겨보았다. 뒤돌아선 그는 잠시 멈춰 섰다.

 “아, 노래 정말 잘 들었어요. 워낙 좋아하는 노래거든요.”

 칭찬을 남기고 떠나려는 엘프는 그의 셔츠 자락이 붙잡히자 멈췄다.

 “…이 노래, 잘 아세요?”

 찬의 물음에 몰래 음흉한 미소를 지은 엘프는 테이블에 돌아와 자연스레 찬을 마주보고 앉았다.

 “그럼요. 보기보다 제가 정말 오래 살았거든요. 요즘엔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이 드문데, 찬 씨의 목소리로 듣게 되니까 더 감동적이고 좋은 거 있죠.”

 엘프는 매혹적인 목소리로 찬의 칭찬을 늘어놓았고, 아예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의 음료를 홀짝였다.

 “가, 감사합니다.”

 뺨이 조금 붉어진 찬은 쑥스러운 듯이 뒷머리를 살살 긁었다.

 “참,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저는 아스타리온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찬.”

 아스타리온은 찬에게 악수를 청하며 핏기 없이 창백한 손을 내밀었다. 찬은 머뭇거리다 따뜻하고 굳은살이 박힌 두툼한 손을 내밀어 엘프의 손을 잡았다. 아스타리온은 두어 번 손을 흔들다가 놓아주었다.

 “기타를 꽤 오래 치셨나 보네요?”

 엘프의 물음에 찬이 손끝을 바라본 뒤 대답했다.

 “그,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어요. 어… 15년 정도?”

 “뭐야, 사실 50년이라고 해도 얼마 안 됐다고 하려고 했는데, 진짜 얼마 안 됐네?”

 찬은 엘프의 농담을 듣고 긴장한 표정 없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근데, 찬 씨가 마시는 음료는 뭐죠? 특이한 색이네요. 이런 술은 처음 봐서.”

 “아, 이거요? 초코 칵테일….”

 찬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초코 칵테일? 내가 오래 살아봤지만 이런 음료는 또 처음이네. 이런 거 마시면 노래를 잘하게 되나 보네요?”

 서로 웃으며 분위기가 조금 풀어지자, 아스타리온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찬, 혹시 개 키워요?”

 칵테일 잔을 만지며 어색한 미소를 짓던 찬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아, 아니요?”

 아스타리온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며 신경 쓰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저, 제가 개를 키웠어야… 되나요?”

 “네? 아니, 당연히 아니죠. 그냥 그쪽 얼굴을 보면 개들이 좋아할 것처럼 생겨서 물어봤어요.”

 아스타리온은 괜히 다른 곳을 쳐다보았고, 찬은 혼자 중얼거렸다.

 “강아지, 키, 키우고 싶다….”

 아스타리온은 어색해진 기분에 자신의 남은 음료를 다 마셔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찬이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아스타리온 씨. 혹시, 그러니까, 내일도 오실 건가요?”

 엘프가 잔을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찬을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여행하러 와서 잠깐 들린 거라 내일은 아침 일찍 돌아가려고 했거든. 솔직히, 벌써 집이 그리워졌어. 근데 네가 내일도 오는 거면, 보러 오고 싶긴 하네. 자기가 노래할 때, 진짜 멋있는 거 알아? 지금보다 더.”

 “자, 자기? 지, 지금보다 나아요? 정말…?”

 어쩔 줄 모르는 찬의 모습을 바라보던 아스타리온은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되게 귀엽게 구네. 다른 건 아니고, 사실 노래하는 네 모습이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거든.”

 아스타리온은 찬을 좀 더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어 있는 잔을 만지며 여유롭게 말했다.

 “아, 그러니까 응원하는 입장에서 좋아한다는 거야. 오해할까 봐.”

 찬은 조금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엘프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멋진 건 아닌가 보네요….”

 “아니, 너도 멋있어. 잘생겼고.”

 아스타리온은 시선을 돌려 목을 가다듬었다. 그의 앞에 앉은 남자는 다시 뺨을 붉히고 있었지만, 엘프는 보지 못한 듯했다.

 “그, 근데 누가 떠오르는 건데요?”

 찬이 호기심 가득한 두 눈을 뜨며 말했다.

 “자기, 혹시 포트리스 알아? 아까 네가 부른 노래랑 똑같은 곡 불렀다가 SNS에서 인기 많아진 사람.”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찬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스타리온을 내려다보며 조금씩 떨고 있었다.

 “찬? 왜 그래?”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가게 안의 사람들이 모두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스타리온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찬을 바라보았다.

 “저, 저… 저, 이만 가볼게요.”

 “찬? 잠깐! 왜 그래?”

 찬은 말을 끝내자마자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테이블에 홀로 남겨진 아스타리온은 찬이 떠난 자리를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때, 다른 사람이 테이블을 향해 걸어왔다.

 “손님, 찬이한테 도대체 무슨 말을 하셨길래? 쟤가 한 번도 저런 적이 없었는데?”

 “네? 제가 뭘요? 오히려 칭찬을 잔뜩 했지.”

 술집 주인을 본 아스타리온은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

 “그리고, 저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거든요?”

 엘프는 한숨을 쉬며 셔츠의 단추를 하나 열었다.

 “흠, 저도 초코 칵테일 하나만 주세요. 이대로 돌아가면 억울해.”

 “거… 손님, 죄송하지만 그런 메뉴는 없습니다.”

 아스타리온은 다리를 떨며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네? 아까 찬 씨가 마시던 건?”

 “그거 그냥 초코 우유입니다.”

의자를 박차고 술집에서 나온 찬은 건물 뒤 어두운 구석에 있었다. 몸을 움츠리고 앉아 코를 훌쩍거리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이제는 여기까지 찾아와서 내 정체를 밝히려는 거야?”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다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괜히 했어. 그냥 숨어 지냈으면 이런 일도 없는 건데, 왜 그랬지?”

 

 찬이 한숨을 쉬며 입을 꾹 다물고 울음을 참는 사이, 멀리서 네 다리의 하얀 형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하얀 생명체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인 찬의 정수리에 얼굴을 비비며 낑낑거렸다.

 

 “응, 스크래치. 나는 괜찮아. 아마도, 그럴, 거야…”

 

 그는 훌쩍거리며 스크래치를 쓰다듬고 나서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을 쳐다보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쉬었고, 액정을 몇 번 두드리더니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하얀 개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제, 진짜, 별일 없을 거야. 아무도 날 알아보지 않을 테니까...”

 

 그는 다가오는 스크래치를 커다란 품에 껴안았다.

 

 “그 녀석들이 날 알아보는 건 시간 문제야. 이렇게 하는 게 맞아.”


찬은 품에서 낑낑대는 스크래치를 쓰다듬으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초코 우유를 거절하고 여관에 도착한 아스타리온은 여행용 캐리어에서 혈액 팩 하나를 꺼냈다.

 “역시! 나한테는 이게 술이지. 다른 건 도저히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그가 툴툴거리며 빨대를 꽂아 몇 번 쪽쪽 빨아먹자, 순식간에 팩이 비워졌다. 빈 팩을 쓰레기통에 던진 뒤, 낯빛이 한결 밝아진 엘프는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집에 가고 싶다. 침대도 너무 불편해.”

 창백한 엘프는 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끌어올렸고, 침대에선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짜증 섞인 한숨을 쉬고 충전 중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노래나 듣자.”

 평소처럼 포트리스의 커버 곡을 들으며 명상하기 위해 유튜브에 접속했다. 그러나 눈에 보인 화면을 보고 엘프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야만 했다.

 “잠깐, 뭐, 뭐야?”

 엘프는 붉은 두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뚫을 것처럼 쳐다보았다.

 “거짓말. 아니, 왜? 잘못 검색했나? 아닌데?”

 그가 찾은 포트리스의 채널에는 업로드 된 모든 영상이 사라져 있었다. 여기저기 포트리스를 검색했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스타리온은 한동안 침대에 앉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다음 날 이른 저녁, ‘고룡 술집’ 앞에 익숙한 은색 차량이 멈춰 섰다. 어제와 같이 정갈하게 차려입은 하얀 곱슬 머리의 엘프는 차 안에서 분주했다.

 “해가 늦게 지네, 또 발라야겠어.”

 아스타리온은 조수석에 놓여있는 핸드백에서 ‘뱀피릭 자외선 차단제’를 꺼냈다. 백미러에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익숙하게 거울을 보지도 않고 적당량을 쭉 짜서 얼굴과 드러난 살갗에 펴 발랐다. 차단제를 가방에 다시 넣고 셔츠를 내려다본 그는 물티슈 한 장을 뽑았다.

 “에이… 다른 옷도 좀 가져올 걸.”

 흰 셔츠에 묻은 희미한 빨간 자국을 벅벅 닦으며 투덜거렸다. 잠시 후, 엘프는 알이 없는 은테 안경을 챙겨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왔다. 해가 떠 있어도 문제없이 서있던 창백한 엘프는 가슴에 묻은 것을 신경쓰며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짤랑-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술집 주인은 그를 향해 인사하던 중에 멈칫했다. 어제와는 달리 술집 안은 떠들석한 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영업시간 맞죠?”

 “네, 손님. 어떤 걸로 주문하시겠어요?”

 “어제 마시던 걸로 주세요.”

 아스타리온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어제 앉았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두 테이블 너머에 있는 무대에는 마이크와 앰프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잠시 후 음료가 나왔다.

 “감사합니다. 혹시, 제가 너무 일찍 왔나요?”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오늘같이 주말을 앞둔 날에는 단골분들도 도시로 나가 가족과 외식을 하러 가곤 하죠. 하하.”

 술집 주인도 손님이 없어 그런지, 아스타리온의 맞은편에 앉았다. 처음에 엘프는 주인을 외면했다가 다시 주인을 쳐다보며 질문했다.

 “그럼 찬 씨는요? 그분도 가족과 외식하러 나갔나요?”

 “찬? 걔는 혼자 살아요. 그나저나 손님,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주인이 물컵을 테이블에 내려 놓으며 아스타리온을 의심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네? 그런 개인적인 것도 제가 알려드려야 합니까? 그리고! 별일 없었어요. 처음 만난 사이에 나누는 평범한 대화였다니까…”

 아스타리온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음료를 한 모금에 들이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계산해주시죠.”

 “네, 네, 손님.”

 주인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아파서 오늘은 못 나오겠다고 하더군요. 아픈 적이 잘 없었는데, 뭐… 손님이 괴롭혔습니까?”

 “아니, 저기요?”

 아스타리온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주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시간이 많으신 거 같은데, 저 대신 이 약이라도 좀 전해주세요. 찬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손님이니까 부탁 좀 하겠습니다.”

 “제가 왜? 직접 전해주면 되지 않습니까? 전 그냥 손님인데요.”

 “온종일 가게를 봐야 하거든요. 아무리 손님이 없어도 말이죠. 오전부터 시간이 안 났어요.”

 주인은 진지하게 말하며 카운터 밑에서 약봉지를 꺼냈다. 팔짱을 끼고 바라보던 엘프는 경악하며 거절하려 했고, 주인은 필사적으로 약봉지를 그에게 넘겼다.

 “자, 얼른 가세요. 대신 오늘 음료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주인의 ‘허허’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아스타리온은 가게 밖으로 내쫓겼다.

 아스타리온은 차를 끌고 여관 주차창에 돌아왔다. 그는 핸드백 옆에 놓인 약봉지를 쳐다보며 짜증을 냈다.

 “젠장, 집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한숨을 쉬며 차 안에 앉아있는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가로등은 켜진 지 오래고, 이곳 하늘엔 높은 건물 하나 없어 별들이 무수히 나타났다. 그때, 먼 곳에서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뭐, 뭐야!”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거리는 좁혀졌고, 큰 체구의 사람이 차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쿵쿵!

 “제발 살려주세요!”

 쫓기는 듯한 사람은 허둥지둥 뒤를 돌아보다가 다시 창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찬?”

 귀와 눈썹에 박힌 반짝거리는 장신구, 눈 주위에 새겨진 문신 그리고 색이 다른 두 눈. 누가 봐도 어제 봤던 포트리스, 아니, 무대에서 노래하던 남자였다. 아스타리온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차문의 잠금을 풀며 빨리 타라고 손짓했다.

 쿵!

 찬은 조수석 문을 급하게 열고 거칠게 올라탔다.

 “빨리, 빨리! 문, 문 잠그세요!”

 그가 시키는 대로 급하게 문을 다시 잠근 엘프는 눈을 아주 동그랗게 뜨고 창밖의 이쪽저쪽을 휘둘러보았다.

 “허억, 가, 감사합니다.”

 가쁜 숨을 고르며 찬이 감사 인사를 전하는 사이, 창밖에는 하얀색 털의 개가 달려왔다.

 “저, 저 개가! 저를 물려고 자꾸 쫓아와요! 나, 나는 물리기 싫어요! 너, 너무 무서워요, 제발 살려주세요!”

 찬은 운전석 쪽으로 몸을 웅크려 벌벌 떨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혹시 닿을세라 몸을 옆으로 비켰다. 하얀 개 옆으로 어떤 사람이 다가오더니 “스크래치, 집에 가자! 도대체 누굴 쫓아왔니?”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스크래치는 꼬리를 붕붕 돌리며 혓바닥을 내밀고, 찬이 탄 차 안을 계속 바라보았다. 결국엔 꼬리와 귀를 축 떨어트린 채 주인과 함께 돌아갔다.

 “흠? 찬? 저 개는 그냥 너랑 놀고 싶은 거 같은데.”

 찬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다가 엘프의 말을 듣고 움찔했다.

 “제, 제 이름을 어떻게 아, 아세요?”

 “….”

 아스타리온은 무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몇 번 킁킁 냄새를 맡고 한숨을 쉬었다.

 “술 마셨어?”

 “에? 네엥.”

 차 주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허- 웃고는 핸들의 윗부분을 가볍게 팡팡 두드렸다.

 “음, 근데 많이 안 마셨어요. 이 동네에 따악! 하나 있는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사서 마셨어요. 밖에서 마시고 있는데… 아까 그 하얀 개가 막 달려오길래 무서워서 도망쳤어요.”

 색이 다른 두 눈에서 다시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엘프는 재밌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한 캔 마시고 취한 거야?”

 “그런데, 그러니까, 제 이름 어떻게 아세요?”

 “진짜 기억 안 나? 조금 서운해질 것 같네?”

 찬은 훌쩍거리며 실눈을 떠 운전석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붉은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자, 엘프는 인상을 팍 썼다.

 “와, 술 냄새. 제발 차에서 나가.”

 아스타리온은 찬의 어깨를 두 손으로 밀었다. 끄떡없던 찬은 스스로 뒤로 물러났다.

 “진짜! 어제 그 복슬머리 아저씨네요!”

 “아, 아저씨?”

 하얀 머리 엘프는 상상도 못한 단어를 듣고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찬은 헤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꼬리가 달렸다면 분명히 붕붕 흔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저 봤다고 인터넷에 쓰지 말아 주세요.”

 “뭐가?”

 아스타리온은 시선을 내려 찬이 입은 회색 셔츠를 보았다. 어제와 달리 하얀 개털이 몇 가닥 붙어있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야? 네가 포트리스라고?”

 “네? 아시는 거 아니었어요?”

 찬은 혼란스러운 듯 두 눈을 글썽이며 엘프를 쳐다봤다.

 “그래서 뛰쳐나간 거였어? 정체가 들켜서? 그럼 영상은 왜 지운 건데?”

 “그게… 사람들이 떠날까 봐 무서웠어요.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예전에 생긴 걸로 놀림도 받았고, 괴롭힘이 너무 심해져서 못 버티고 학교도 그만뒀거든요…”

 “요즘에도 그런 애들이 있어?”

 찬은 여전히 아랫입술을 내민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타리온은 추욱 처진 찬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럼 오늘은 왜 안 나왔어? 사장님이 너 아프다고 하던데, 술 마신 거 보면 거짓말이지?”

 고개를 숙여 허벅지만 쳐다보던 찬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진짜, 아팠어요. 몸살이라도 났나 했죠.”

 “근데 술을 마셔?”

 아스타리온은 찬을 째려보다가 점점 표정이 누그러지더니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야, 엉덩이 들어봐. 네 엉덩이 밑에 약봉지 있어. 가져가.”

 엘프는 찬이 깔고 앉은 약봉지를 가리켰다. 찬은 엉덩이를 옆으로 치워 약봉지를 꺼내 들었고, 그 옆의 고급 브랜드 이름이 적힌 가방 또한 찌그러진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 이거는! 아니, 제가 이것도 깔고 앉았으면 말씀해주셨어야죠!”

 “말할 틈도 없이 네가 다 깔고 앉았는데 어떡해. 손해배상 청구할 거야.”

 좁은 조수석에서 약봉지와 핸드백을 들고 쩔쩔매는 찬을 보며 아스타리온은 키득거렸다.

 “당연히, 제가 배상해야죠. 아저씨도 아시겠지만, 100만 조회수도 있고, 10만 명의 구독자도 있으니까요.”

 “제발, 아저씨라고 그만 불러주겠어? 그냥 이름 부르라고. 그리고 너 영상 다 지웠다며.”

 “아.”

 두 사람은 말없이 앉아 있었고, 주위에선 풀벌레 소리만 들렸다.
 


“제안 하나 할게.”

 정적을 뚫고 아스타리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솔직히 너 구독자 수 100명일 때부터 봤어. 대단하지 않아? 그런데 옆에 있는 네가, 툭하면 우는 네가 포트리스라고? 솔직히 안 믿겨. 뭐, 싫다는 뜻은 아니야. 아무튼, 목소리도 좋고 부르는 노래도 다 내가 좋아하는 곡이라서 자주 봤어.”

 “가, 감사합니다.”

 찬은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괜히 약봉지를 만지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좋아도 내 차에 들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죄, 죄송해요….”

 “사과는 됐어.”

 아스타리온은 가볍게 손을 휘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너, 설마 영상들 영구 삭제한 건 아니지? 제발.”

 “네, 비공개 처리만 했지 아직 남아있어요. 아마도.”

 찬은 눈웃음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아마도? 흠, 있다고 믿을게. 그러니까 그걸 다시 공개해! 나 그거 못 들으면 불안해서 잘 수가 없다고.”

 엘프는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흔들며 소리쳤다.

 “그, 그게 제안이에요?”

 “그래. 아니면 뭐 내가 돈이라도 요구할 줄 알았어? 이봐, 포트리스 님, 못 믿겠지만 난 네 팬이라니까?”

 어쩐지 차갑고 단호한 팬 앞에서 찬은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누가 또 저를 찾아내면 어떡하죠?”

 “지금까지 별 문제없었잖아? 그리고 네가 어떤 모습이든 좋아하는 팬이 더 많을 거야. 아니면 나한테 도움을 청해. 내가 지인이 좀 많거든? 오래 살다 보면 그렇게 되더라. 아무튼, 너무 걱정하진 마. 잘 해왔잖아.”

 울기 직전의 색이 다른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고마워요. 저, 그럼 아스타리온만 믿고 다시 올릴 거예요.”

 “어, 이렇게 빨리? 난 며칠 더 생각할 줄 알았는데”

 이글거리는 건지 글썽거리는 건지 이제는 구분이 안 가는 찬의 눈을 본 아스타리온은 눈을 끔벅거렸다.

 “그게… 사실 노래하는 거 포기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학교를 그만뒀을 때도 음악 듣는 게 제일 힘이 되었고, 노래하는 게 제일 재밌더라고요.”

 찬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면! 혹시 댓글도 많이 남겨요? 누구예요? 알려줄 수 있어요?”

 아스타리온의 붉은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찬의 시선을 피하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아, 아니? 나 댓글 많이 안 남겨. 조용히 듣기만 해서.”

 “그렇구나…. 아무튼 정말 감사해요. 안 그래도 요즘 모르는 사람들이 ‘네가 누군지 다 안다.’ 이런 DM을 보내서 다 그만두고 도망치고 싶었는데, 다시 용기가 생겼어요.”

 조용히 찬의 얘기를 듣던 아스타리온은 인상을 잔뜩 쓴 얼굴로 휙 돌아보았다.

 “미친, 가서 다 암살해버릴까?”

 “네? 그, 그러지는 마세요.”

 찬이 그를 말렸고, 아스타리온은 화를 가라 앉혔다.

 “아, 미안. 옛날에는 맘에 안 들면 암살하고 다녔거든.”

 “우와… 얼마나 옛날이길래…. 어쨌든, 당신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내가 뭘….”

 이번엔 아스타리온이 쑥스러운 듯이 다시 창밖만 바라보았다.

 “근데 얼마나 오래 사신 거예요?”

 아스타리온은 천천히 찬을 돌아보며 고민하다 말했다.

 “흠, 너도 과거 얘기 하나 해줬으니까 나도 해줄까? 적어도 2세기는 훨씬 넘게 살았지. 뭐 엘프에겐 딱히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네.”

 찬은 별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 안이 조용해지자 아스타리온이 입을 열었다.

 “영상 꼭 다시 올려. 알았지? 그럼, 나가자. 나 차에 술 냄새 배는 거 진짜 싫어해.”

 “아, 넵.”

 나가기 위해 실내등을 끈 엘프가 차 문을 열었을 때,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실내등이 다시 켜졌다.

 “뭐야? 왜?”

 불을 켠 찬이 밖으로 나가려는 엘프의 셔츠 자락을 잡았다.

 “옷에… 이거 피 묻은 거 아니에요?”

 “응? 야, 한 방울 묻은 걸로 피인지 고추장인지 어떻게 알아. 신경 안 써도 돼.”

 당황한 표정을 한 엘프는 얼른 나가자고 부추겼다. 그러나 차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는 갈색 머리는 꿋꿋하게 앉아 말했다.

 “그리고, 제 노래 들으러 오셨을 건데. 고룡에 다시 가요.”

 “고룡? 아, 술집? 근데 너, 술 마셨잖아.”

 큰 체구를 어떻게 할 수 없던 엘프는 포기하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네, 술 먹고 노래한 적은 거의 없어요. 그래도 내일 떠나실 거 아니에요? 듣고 싶은 곡 불러드릴게요. 듣고 가요.”

 진지하게 말을 전한 찬의 뺨과 귀는 불그스름했고 무릎에 주먹을 얹고 정면을 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할게. 정말 귀찮아.”

 아스타리온은 툴툴거리면서도 안전벨트를 맸다. 덩달아 찬도 자연스럽게 벨트를 매자, 엘프는 시동을 걸었다.

 “나는 내 차에 아무나 안 태운다고.”

 “죄송해요…”

 “사과는 됐어. 차라리 내 차에 탄 걸 자랑스러워하란 말이야.”

 5분도 안 되는 거리를 가는 동안, 아스타리온은 어색할 틈도 없이 계속 말했다.

 “나도 사실 유튜브 한다? 근데 5천 명에서 더 이상 늘지가 않아. 일 다 때려치우고 한 건데 큰일났어.”

 “우와, 정말요? 어떤 영상 올려요?”

 “그냥 이것저것? 사실 네 정체 밝히면 조회수가 엄청 오르지 않을까 같은 상상도 잠깐 해봤어.”

 “네?”

 찬은 운전 중인 그의 옆모습을 억울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미안, 그냥 상상만 했어. 실천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넌 계속 노래해야 해. 음, 그게 맞아.”

 어느새 술집 앞에 도착했고, 찬은 시무룩한 기색을 보이며 차에서 내렸다. 아스타리온도 따라 내려 자신보다 손 한 뼘 넘게 큰 찬의 옆에 서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괜찮아? 미안. 그런 영상 올릴 생각 하나도 없으니까, 표정 풀래…? 라이브는 해줄 거지?”

 엘프는 입술을 씹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사과했고, 찬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진짜죠? 올리지 마세요, 저는 아스타리온 믿어요.”

 금세 표정이 밝아진 찬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쟤, 저러다가 사기당할 것 같아….”

 아스타리온은 찬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리다 그를 따라 술집에 들어갔다.

 “뭐야? 왜 두 사람이 같이 와?”

 “아, 제가 노래 불러준다고 약속했거든요.”

 가게 주인이 두 사람을 요상한 눈빛으로 째려보자 아스타리온은 시선을 피했다. 아스타리온은 익숙한 자리에 앉았고, 찬은 무대 위에서 기타를 들고 마이크 테스트를 했다.

 “아, 아-, …아스타리온, 좀 더 가까이 앉아도 괜찮아요. 손님도 없으니까.”

 찬은 말을 마친 후 주인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스타리온은 잠시 망설이다가 무대 앞 테이블로 가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새삼 너랑 포트리스 손, 진짜 똑같이 생겼어. 여기서 정말 아무도 안 알아봤어?”

 “네. 이곳에 오시는 분들은 유튜브가 뭔지 모르실 걸요? 그래서 제가 여기서 계속 노래한 것도 있어요. 예전부터 무대에서도 노래하고 싶었는데, 저랑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면 저를 알아볼까 봐... 그런 것도 있고, 저를 아들처럼 대해주시는 분들 앞에서는 어쩐지 편하게 노래할 수 있겠더라고요.”

 아스타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근데, 내 앞에서는 왜 해?”

 “어쩐지 편해요. 오래 사셔서 그런가? 암튼, 어떤 노래 듣고 싶어요?”

 “놀리는 거야?”

 앞에 앉은 관객 한 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무대 위의 사람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네가 처음 올렸던 거 듣고 싶어. 그거도 나 많이 들었거든.”

 “아, 네. 알겠습니다.”

 포트리스는 관객이 노래 제목을 말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들었고, 곡의 코드를 하나씩 연주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을 위해 노래하는 거는 독립한 이후로 처음이네요.”

 찬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말을 이어갔다.

 “살다 보면 결국 어둠은 떨쳐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더라고요. 그럴 때 이 노래를 들으면서 위로받고는 했죠. 아스타리온도 그런가요? …들려드릴게요. Dark Necessities라는 곡입니다.”

음 날, 아스타리온은 도시로 돌아갔고, 찬은 저녁마다 가게에 나와 노래하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새벽에 집으로 돌아온 찬은 그제서야 아스타리온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침대에 누워 포트리스 영상을 보다가 찬의 문자가 오면 미소 지었다.  그는 ‘빨리도 물어보네’라며 답장했다. 찬은 평소 새벽에 영상 녹화를 했고, 잠을 거의 자지 않는 엘프와 문자를 주고받는 일이 많아졌다. 직접 만날 일은 없었지만, 두 사람은 문자로 일상을 공유하며 점점 가까워졌다.

 찬은 아스타리온이 왜 유튜브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오래 살다 보니 다양한 모험을 하는 것이 최고라며, 요즘 사람들 다 한다는 유튜브를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전에 다닌 회사가 사업을 성공해서 차도 있고 집도 있는 엘프는 일도 그만두고 호기롭게 유튜브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채널이 잘 안돼서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 찬은 “저는 참 운이 좋네요. 알고리즘 덕분에 이렇게 된 거 같아요.”라고 답했고, 아스타리온은 “네 목소리와 실력이면 뭘 해도 다 잘 됐을 거야.”라며 칭찬하곤 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응원하고, 힘들 때도 연락하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서로를 제외하면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아스타리온은 엘프의 긴 수명 때문에 사람을 오래 사귀는 게 힘들다고 둘러댔고, 찬은 따돌림받던 시절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사람 만나는 게 두렵다고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은 구독자와 포트리스가 아닌 아스타리온과 찬으로서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푸른 잎이 점차 변색하고,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 계절이 찾아왔다. 찬은 무대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가게에 도착해서, 테이블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찬, 조회수 올리는 방법 없어?]

 핸드폰 화면에는 ‘아스타리온’이라는 이름이 보낸 문자가 떠있었다. 찬은 그와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어… 그냥, 좋아하는 거, 하고 싶은 걸 찍어 올려봐.]

 [나는 내 몸의 털 하나라도 찍고 싶지 않아.]

 [네가 나오지 않아도 돼. 근데 엘프는 털 안 나잖아]

 [머리털은 나거든?]

 찬이 큭큭 웃는 사이, 문자가 또 왔다.

 [아, 나 영화 보는 거 좋아해. 와인 마시면서 넷플릭스 보는 게 특히 최고야.]

 [그럼, 영화 리뷰는 해봤어?]

 [아니? 그거 빼고 다해본 거 같은데…?]

 찬이 엄지를 두드리며 ‘그럼 영화 리뷰 해보는 건 어ㄸ’까지 썼을 때, 상대방이 문자를 보냈다.

 [같이 영화 볼래?]

 “뭐? 갑자기?”

 찬은 놀란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침착하게 쓰던 내용을 지우고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언제?]

 핸드폰 액정에는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내일? 너 하루 정도 안 나가도 별일 없잖아.]

 “내일?”

 “찬, 누구랑 그렇게 행복하게 문자 해? 애인 생겼나 보다?

 어두운 구석에서도 핸드폰 화면의 빛을 받아 미소 짓고 있는 찬의 표정을 본 술집 주인이 그를 놀렸다.

 “에? 아, 아니에요. 전에 왔던 하얀 머리 엘프 손님이에요.”

 “흰 머리 엘프 손님은 되게 많이 오시는데…”

 주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카운터에 돌아가자, 찬은 다시 고개를 숙여 핸드폰에 집중했다.

 [근데 어디서 봐?]
 
[내가 데리러 갈게. 고룡에 나와있어. 오후 6시.]

 다음 날, 아스타리온이 시간에 맞춰 차를 몰고 가게 앞에 도착했다. 서서 기다리고 있던 흰 셔츠에 기타 가방을 멘, 큰 체구의 남자가 어색하게 그를 반겼다.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네…!”

 그는 뒷좌석에 기타를 두고 조수석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안녕, 찬? 그러게 오랜만이네. 네 얼굴 까먹을 뻔했어.”

 찬은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고, 옷깃을 만지고 앞머리도 쓸어 올리면서 혼자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나, 오늘은 술 냄새 안 나지?”

 그는 바지가 꽉 끼는지 허리띠도 만지작거렸다.

 “너 술 원래 안 마시잖아. 그리고 뭘 이렇게 차려 입었어? 이상한 향수 냄새는 뭔데?”

 “….”

 찬은 옷자락을 잡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아스타리온은 고개를 저으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봤지만 입꼬리는 올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관 어디로 가?”

 정리를 마친 찬이 안전벨트를 주욱 당기면서 물었다.

 “음? 영화관 안 갈 건데?”

 “에, 영화 본다며.”

 “응, 근데 나 넷플릭스 보는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찬은 어리둥절한 채 눈을 깜빡였고,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눈을 지나고 있었다.

 “에어컨 틀어 줘?”

 “아, 괜찮아.”

 그를 짠하게 바라보던 엘프는 티슈 한 장을 뽑아주고 에어컨을 켰다.

 “누가 보면 데이트라도 가는 줄 알겠어. 근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 우리 집에 갈 거야.”

 아스타리온은 태연하게 말을 끝내고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찬은 안전벨트를 매다 말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움직임이 없는 그를 발견한 엘프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괘, 괜찮아?”

 “응…”

 찬은 흐르는 땀을 닦지도 못한 채, 두 뺨과 귀를 붉히며 앉아 있었다.

 “야, 땀을 왜 이렇게 흘려. 에어컨 엄청 세게 틀었어.”

 아스타리온은 아예 티슈 한 갑을 그의 무릎 위에 얹어주었다.

 “친구 집에서 영화 보는 게 그렇게까지 할 일이야? 아, 싫으면 말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시동을 걸었다. 

 도시 외곽에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은 꽤 멀었다. 아스타리온은 차를 운전하며 찬에게 꾸준히 질문을 던지고, 찬은 대답하면서 긴장을 풀어갔다.

 “너 초코 우유 좋아해?”

 “응. 좀 많이 좋아하지. 달콤하고, 부드럽고…”

 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표정은 지금도 마시고 있는 것만 같이 행복해 보였다.

 “너 전에 칵테일이라고 한 거, 사실 초코 우유라며.”

 찬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창밖만 쳐다보았다. 점점 아파트에 가까워지자 아스타리온은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영화 보면서 먹을 거 사와.”

 “그럴까? 네 거는 뭐 사올까…?”

 “난 됐어. 집에 가면 내 거는 따로 있거든. 찬, 네 것만 사오면 돼.”

 찬이 문을 열어 나갔고, 아스타리온은 홀로 남아 그가 편의점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와, 너무 춥다.”

 그는 당장 에어컨을 끄고 팔뚝을 마구 비볐다.

 “얼어 죽는 줄 알았네.”

 창백한 엘프는 오들오들 떨다가, 잠시 후 편의점에서 찬이 나오자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코 앞이야.”

 비닐 봉투를 들고 차에 탄 그가 벨트를 매자, 아스타리온은 다시 출발했다. 창밖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줄지어 있었다.

 

 “우와… 여기 살아? 엄청 비싸 보여.”

 “맞아. 심지어 치온타 강 뷰라니까? 너 보고 놀라지나 마.”

 “우와…”

 찬이 감탄하는 사이 은색 차량은 지하 주차장에 멈췄고,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로 한참을 올라가더니 30층에 내렸다.

 

 “이렇게 높은 층에 살면 어떤 기분일까?”

 

 찬이 신기해하며 복도를 걸어오는 동안, 아스타리온은 현관문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이 해제되자 엘프는 문을 열었다.

 “별 생각 안 들어. 맞다, 너 겁쟁이지? 너무 높다고 무서워하는 거 아냐?”

 “거, 겁쟁이라니! 이 근육들이 가짜는 아니거든.”

 집주인은 ‘뭔 소리야?’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등이 켜지며 그는 구두를 실내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뭐야, 왜 안 들어와?”

 찬이 현관 앞에서 비닐 봉투를 들고 우뚝 서있었다.

 “드, 들어갈 거야.”

 창백한 엘프가 사는 집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벽지는 물론, 암막 커튼까지. 그래도 몇몇 가구는 포인트를 주어 흰색과 빨간 색도 섞여 있었다.

 “아, 좀 너무 어둡나? 그게, 사람을 많이 안 들여봐서.”

 아스타리온은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눌러 집 안의 조명을 켰다.

 “괜찮아. 나도 어두운 거 좋아해.”

 “아무 말이나 하지 말고.”

 “진짠데…”

 찬은 심호흡을 하고 뺨을 몇 번 두드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집에 들어왔다. 그는 신발을 벗고 아스타리온이 꺼내 놓은 실내용 슬리퍼를 신었다.

 “와…”

 그는 입을 쩍 벌리며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넓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그때, 침실로 향하던 아스타리온이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맞다! 그리고 나 할 말 있어.”

 찬은 주방을 둘러보며 카운터 위에 비닐 봉투를 올려두었다.

 “아까 차에서 얼어 죽을 뻔한 거 알아? 우리 집에서는 에어컨 안 틀어 줄 거야.”

 말을 마친 엘프는 자켓을 벗으면서 침실로 들어갔다.

 “뭐? 아니, 추우면 말하지…!”

 “네가 비 맞은 생쥐처럼 땀을 흘리는데 어떻게 말하겠어?”

 아스타리온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문을 닫았다. 찬은 조심스럽게 거실 소파에 앉았고, 여전히 어색한 듯 옷을 만지작거렸다.

 

 아스타리온은 위아래로 하얀 잠옷을 입고 그 위에 하얀색 실크 가운을 걸쳤다. 문을 열고 나오려다 멈칫한 그는 다시 옷장 앞에 돌아가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사이즈가 큰 반팔 티 하나를 손에 들고 방에서 나왔다.

 “찬, 이거 입을래? 너한텐 작을 거 같긴 한데… 네 셔츠보다는 이게 낫지 않을까?”

 그는 소파에 정자세로 앉아있는 찬에게 반팔 티를 건넸다. 찬은 벌써 땀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고, 고마워.”

 땀을 닦던 찬은 하늘하늘한 가운을 입은 엘프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찬의 두 눈이 커졌고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붉어지는 귀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갈팡질팡하더니 욕실을 향해 뛰어갔다.

 “아니, 방에서 갈아 입, 가버렸네.”

 아스타리온은 찬을 잡으려 들어올린 손을 거두고 소파에 앉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던 그는 쿠션 하나를 끌어안았다. TV를 켜 이따 볼 영화를 찾으면서도 계속 키득거렸다.

 “역시... 오늘이 낫겠지?”

 리모컨을 만지던 엘프는 혼자 중얼거렸고, 찬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스타리온? 이거 벗어야 할 거 같아…”

 “많이 작아?”

 엘프는 리모컨을 내려두고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여전히 꽉 끼는 정장바지에 터질 것 같은 허리띠만 봐도 그는 웃음이 나왔다.

 

“푸핫!”
 
그리고 아스타리온이 준 나름 큰 옷은 찬의 몸에서 탈출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야, 진짜, 너무 웃겨.”

 

 아스타리온은 웃느라 바빴다. 욕실 앞에는 여전히 비를 맞은 것처럼 땀 흘리는 사람이 있었다.

 “너, 무슨 브래지어 입은 것 같아.”

 “아, 아니 뭔 소리야! 어우, 수, 숨막혀 죽을 것 같아.”

 찬은 울상을 지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는 결국 옷을 훌렁 벗어버렸다. 땀에 젖은 그의 상체는 근육이 잘 잡힌 탄탄한 몸이었다.

 배를 부여잡고 웃던 아스타리온은 사레에 들릴 뻔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거실로 돌아갔다.

 “크흠, 아주 네 집이야. 그치?”

 

 찬은 다시 자신의 셔츠를 걸쳐 단추를 잠그고 욕실에서 나왔다. 땀을 닦는 찬 옆에서 엘프는 한숨을 쉬며 에어컨을 켰다.

 

 “됐어. 그냥 에어컨을 트는 게 낫겠어.”

 

 “너 춥잖아….”

 

 엘프는 침실에 들어가 솜이불을 하나 가져와서 몸에 둘렀다. 꽁꽁 싸맨 이불 위로 얼굴만 내밀고 있었다.

 

 “이러면 괜찮겠지. 아니, 난 네가 영화관에 갈 생각한 줄은 몰랐어. 뭐, 데이트라도 하려고 그렇게 입고 온 거야? 진짜?”

 

 찬은 피곤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대답도 못했다. 그를 짠하게 바라보던 아스타리온은 그의 옆에 앉았다.

 

 “초코 우유라도 마시는 게 어때?”

 

 “아, 맞다.”

 

 찬은 주방으로 가서 아까 산 초코 우유와 팝콘을 챙겼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초코 우유 한 팩을 뜯어 바로 원샷했다.

 

 “영화도 안 틀었는데?”

 

 “미안, 너무 목이 말라서…”

 

 이불을 꽁꽁 싸맨 엘프는 소파 아래로 내려와 푹신한 러그 위에 앉았다.

 

 “너는 추위를 진짜 잘 타나 보네.”

 

 “네가 열이 많고, 땀이 많은 거야.”

 

 엘프는 흥흥거리며 슬금슬금 이불 속에서 손을 꺼냈다. 리모컨을 몇 번 조작하자 거실의 불이 꺼졌다.

 

 “빨리 와, 이거 볼 거야.”

 

 “응. 근데 무슨 영화야?”

 

 “음… 너랑 보려고 아껴둔 영화?”

 

 찬은 팝콘을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았다. 그는 인상을 쓰며 허리띠를 만졌다.

 

 “바지가 너무 불편해서 그러는데… 버클만 좀 풀고 있어도 될까?”

 

 “우리집에서 바지 버클을 푼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뭐, 지금 이집 기준.”

 

 “뭐, 뭔 말을 그렇게 해…!”

 

 아스타리온은 아무렇지 않은 듯 영화에 집중했다. 찬은 쿠션 하나를 집어 들어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TV에는 영화의 오프닝이 나왔다. ‘Variety of Vampires’라는 제목이 등장했을 때도 찬은 여전히 쿠션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제목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들고 TV를 쳐다봤다.

 

 검은색 가죽 소파 위의 밤색 뒤통수, 그리고 소파 아래에는 이불에 둘러싸인 하얀 곱슬 머리와 옆으로 뾰족 튀어나온 귀. 밤톨머리는 TV를 향해 있다가도 수시로 하얀 머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곤 했다.

 

 “영화 보고 있어?”

 

 화면이 어두워지자 TV에 반사된 찬의 모습을 본 아스타리온이 뒤돌아 눈을 흘겼다.

 

 “응? 당연하지…!”

 

 “지금까지 무슨 내용인데?”

 

 아스타리온은 장난스럽게 찬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정말 보고 있었어! 그, 그러니까… 저기, 나오는 주인공이 뱀파이어 아니야? 저거 봐, 거울에 안 보이잖아.”

 

 “진짜 다 알긴 하네? 근데, 영화 보러 왔지. 나 보러 왔어?”

 

 아스타리온은 따지기는 했지만 붉은 눈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근데, 나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저기 뱀파이어들은 거울에 안 보이는데, 너는 왜 보여?”

 

 호기심 가득 순진한 표정의 찬이 창백한 엘프를 바라보았다.

 

 “그, 그걸 왜 날 보면서 말해?”

 

 아스타리온은 당황스러워했다. 그의 붉은 두 눈이 더 커졌다.

 

 “너도 뱀파이어 아니었어? 모르면 말고…”

 

 “뭐?”

 

 찬은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아스타리온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언제부터 안 거야?”

 

 “응? 뭐가?”

 

 “내가 뱀파이어인 거 어떻게 알았냐고.”

 “어… 아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언제였지…”

 그렇다. 아스타리온은 뱀파이어였다. 그동안 정체를 먼저 밝혔다가 좋은 일은 없었기에 항상 신중하게 밝혔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뱀파이어가 가정을 꾸리고 번식을 한다 해도 그들을 반기는 세상은 아니었고, 억지로 같이 살아가는 정도였다. 근데 알면서 아무렇지 않았던 찬은 아스타리온에게도 새로운 유형의 사람이었다.

 “아마도 술집에서 처음 봤을 땐 몰랐을 거야. 워낙 어두웠으니까. 다음 날 만났을 때 알았지. 선크림도 있었잖아?”

 

 “그, 그건 또 언제 봤는데?”

 

 “가방에 들어있었잖아. 아… 맞다. 찌그러진 거는 계속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다른 동네에서 학교 다녔을 때, 유독 창백하고 뾰족한 송곳니를 가진, 혈액 팩을 들고 다니던 친구가 있었지. 친한 사이는 아니고 같은 반이었어. 걔는 나를 좀 잘 챙겨줬다.”

 

 찬은 전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차근차근 설명했고, 말을 끝낸 뒤 속없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 일이…. 나는 오늘 알려줄 생각이었어. 근데 알고 있는 줄은 몰랐네.”

 

 “헉, 저거 봐. 빨리.”

 

 찬은 TV에서 흥미로운 장면이 나오자 아스타리온의 어깨를 툭툭 쳐서 재촉했다.

 

 “그래, 알았다고.”

 

 영화 속에서는 뱀파이어끼리 화려한 주문을 외치며 싸우고 있었다. 찬은 몰입해서 봤고, 아스타리온은 집중이 되지 않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숨길 것도 없으니까, 혈액 좀 마실게.”

 찬은 팝콘을 와그작 먹으며 쿠션을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아스타리온은 와인냉장고에서 인공 혈액 와인을 꺼냈고, 찬장에서 꺼낸 투명한 와인 잔에 술을 따랐다.

 

 “사실 집에 초대한 것도, 내 거대한 비밀을 드디어 알려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거든. 네 비밀도 내가 아니까.”

 

 그는 잔을 들고 거실에 돌아왔다.

 

 “아, 포트리스라는 거?”

 아스타리온은 와인잔을 낮은 테이블에 올려두고 바닥에 앉았다. 찬은 잠깐 고개를 돌렸다가 소파 밑에 내려와 엘프 옆에 앉았다.

 

 “뭐야, 왜 내려와?”

 

 “아, 미안, 올라갈게.”

 

 허겁지겁 쿠션을 들고 일어나려던 찬은 옆에서 그를 붙잡자 다시 앉았다.

 

 “그냥 앉아 있어. 네가 에어컨을 아주 빵빵하게 틀어 달래서 추우니까.”

 “끄, 끌까?”

 

 “집에 땀냄새 나는 건 딱 질색이니까 켜 놔.”

 

 그러면서 아스타리온은 찬의 단단한 팔뚝에 가볍게 기대었다. 찬은 흠칫 놀랐지만, 내뺴지 않고 그대로 앉아 영화를 계속 보았다. 영화는 액션, 호러, 코믹 등 여러 장르가 다 섞인 특이한 영화였다. 그래서 영화가 조용하게 흘러가는 부분이면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눴다.

 

 “아스타리온, 나 이제 유튜브 그만 하려고.”

 

 갑작스러운 은퇴 고백에 아스타리온은 기댄 몸을 일으켜 찬을 쳐다봤다.

 

 “뭐? 왜 갑자기?”

 

 “그냥 이제는 전처럼 조회수가 안 나와서…. 그리고 언제 들킬지도 모르는 불안함은 여전하니까.”

 찬의 진지한 표정을 본 아스타리온은 다시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든지 네 노래 들을 수 있으니까, 이제는 상관없나? …말이 나와서 그러는데 네가 직접 불러준 노래가 가끔씩 생각나더라. 오늘도 불러주면 안 돼? 뱀파이어 고백 기념.”

 

 솜이불과 하얀 머리가 어깨에 닿는 느낌이 이제는 편해진 듯한 찬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알고 있었다니까. 그래도, 불러 줄게. 네가 차도 태워 주고, 영화도 보여 주고… 그래, 에어컨도 켜 주니까 이건 꼭 노래로 갚아야지.”

 

 원하는 것을 쟁취한 아스타리온은 만족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나, 이제 진지하게 음반을 내서 노래하는 가수가 되고 싶어졌어.”

 

 찬의 색이 다른 두 눈이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여전히 어깨에 기댄 채 자신의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정말? 그럼 포트리스로 활동할 거야? 아니면, 네 이름으로?”

 

 “그게 아직은 모르겠어. 여전히 좀 무서워.”

 

 “새로운 도전을 해보는 것도 좋지, 너무 무리하진 말고.”

 

 아스타리온은 기댄 몸을 일으켜 앉아 힘내라는 듯이 찬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

 

 “그래도 조금 아쉽네. 포트리스의 실물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 좋았는데.”

 

 “노래는 계속할 거니까. 구독자 분들도 나를 계속 좋아해 주시면 좋겠다.”
 
“분명 그럴 거야.”

 찬이 미래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사이, 영화는 절정에 이르렀다. 뱀파이어 주인공과 함께 나오던 인간이 공원에서 서 있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찬은 영화에 집중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찬의 목소리에 아스타리온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찬은 말없이 그저 엘프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뭔데”

 

 “당신을 사랑해요.”
 
갑작스러운 영화 속 대사에 반응한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는 뱀파이어가 인간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고백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찬은 입만 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찬, 뭐라고? 대사 때문에 못 들었어.”

 

 “어? 그, 그게… 그러니까…”

 

 “당신을 사랑한다니까요!”

 

 찬이 머뭇거리는 사이,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이 꽃다발을 바닥에 던지며 인간에게 고백하고 있었다.

 

 “우, 우와. 강렬하다.”

 

 포기한 것 같은 찬이 화면을 보고 감탄하는 사이, 영화 속 두 사람은 격렬한 키스를 시작했다. 찬은 입과 눈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그 모습을 보며 찬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뭐해?”

 

 어느새 영화 속 장소는 침대 위로 변했고 아주 진한 스킨십의 향연이 펼쳐졌다. 뱀파이어 주인공과 인간이 옷을 벗기 시작하자, 갑자기 아스타리온은 TV를 꺼버렸다. 옆에 앉아 잔뜩 뺨과 귀가 붉어진 찬은 이제 가릴 생각도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려서. 아까 뭐라고 했어?”

 

 아스타리온은 어쩐지 웃음을 참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찬은 무언갈 다짐한 듯이 천천히 몸을 돌려 아스타리온의 두 손을 잡았다. 그러나 곧, 찬은 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사랑한다고!”

 

 땀을 흘리면서, 자신도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찬을 본 아스타리온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아, 아니, 아니! 좋아해, 라고 하려고 했는데…”

 

 찬은 맞잡은 손을 놓고서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 미안. 너무 귀엽잖아. 근데 사랑하고 좋아하는 게 많이 달라? 응?”

 

 아스타리온은 소파에 얼굴을 묻고 훌쩍이는 찬을 놀렸다. 엘프의 뾰족한 귀는 피를 마셔서 그런지 전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물론 하프 엘프의 귀는 말할 것도 없이 터지기 직전처럼 보였다.

 

 “나 봐.”

 

 엘프는 찬의 양 뺨을 붙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새 눈물을 흘렸는지 회색 문신 위로 눈물 자국이 있었다. 엘프는 이를 신경 쓰지 않고, 잡은 양 볼을 살짝 눌렀다. 부루퉁한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피 맛 날 텐데 괜찮아? 하긴, 나는 짠 맛보게 생겼어.”

 

 찬은 글썽이는 눈으로 아스타리온을 쳐다보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러자 아스타리온이 다가와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너, 혹시 키스 처음 해?”

 

 아스타리온은 눈물 젖은 양 뺨을 여전히 잡으며 말했다.

 

 “아, 아니?”

 

 “아닐 것 같은데…. 아, 흡혈 하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진 마.”

 

 “해도 돼! 내가 얼마나 건강한데…”

 

 찬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입술을 만지고 있었다.

 

 “그건 아직이야. 아무 피나 안 마셔. 아무리 포트리스라고 해도.”

 

 아스타리온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이불에서 빠져나와 찬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지자 허공을 떠돌던 찬의 손이 엘프의 허리를 느리게 감싸 안았다.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검은 빛이 가득한 거실에 흰 셔츠와 흰 가운을 입은 두 사람의 입술은 오랫동안 합쳐져 있었다. 타액을 입술에 적시고 떨어진 아스타리온은 숨을 몰아 쉬는 찬의 어깨를 살살 밀었다. 찬은 그대로 바닥에 누웠고, 엘프는 가져왔던 이불을 집어 들었다.

 

 “키스는 좀 가르쳐야겠어.”

 

 “뭐, 뭐라고?”

 

 놀라 일어나려는 찬을 다시 밀어 넘어뜨렸다. 아스타리온은 그의 넓은 가슴 위에 누우며 이불을 크게 들어 올려 두 사람을 덮었다.

 

 “…너, 유튜브 안 올려도 돼?”

 

 “다음에 다른 영화 또 보면 돼.”

 

 이불 속에서 두 사람이 소곤거렸다.

 

 “그리고 자기 노래도 다음에 들어야겠어.”

 

 찬이 무어라 반박하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 소리는 이불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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